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갈 때가 있습니다. “어? 이거 지난주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리고 다음 주에 또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은 대체로 정해져 있습니다.
“아니, 왜 말을 안 듣지?”
저도 이 ‘진단서’를 꽤 오래 들고 다녔습니다. 편하니까요. 나는 할 일 다 했고 상대가 안 한 것이니 억울해하기만 하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편한 결론일수록 한 번쯤 의심해봐야 하더군요. 대부분 틀린 진단이었습니다….
직원이 여럿 되고 지시가 여러 갈래로 나가는 상황이라면 한 번쯤 같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 정리해봅니다. 저도 여전히 ‘수련중’인 영역이라 정답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지시가 겉도는 이유 #1. 사라지는 말
말을 한 쪽에는 ‘전체’가 남습니다. 왜 그렇게 시켰는지, 어디까지가 마지노선인지, 안 되면 뭐가 문제인지가 통째로 머릿속에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자기가 생각한 것이니까요.
그런데 들은 쪽에 남는 것은 좀 다릅니다.
- 왜 그렇게 시켰는지
- 어디까지가 마지노선인지
- 안 되면 뭐가 문제인지
- 언제까지 되어야 하는지
- 그날의 분위기
- 대충의 방향
- 그리고 불안
이것은 ‘성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은 ‘소리’라서 그렇습니다. 나오는 순간 사라지고, 남는 것은 각자 머릿속의 서로 다른 판본입니다. 문제는 그 판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지요. 그래서 다음 회의가 되어서야 알게 됩니다. 아, 서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스마트스토어 상세페이지를 아무리 정성껏 만들어놔도 고객이 스크롤을 안 내리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시도 똑같습니다. 내가 한 말도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으면 안 한 것과 같습니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결과가 그러니까요….
지시가 겉도는 이유 #2. 정해지지 않은 기준
저는 직원들에게 늘 이 말을 합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
적는 자만이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지시는 오랫동안 입에서만 나갔습니다. 적으라고 시키면서 저는 안 적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걸 깨닫는 데 시간이 꽤 걸렸고, 그동안 같은 말을 세 번씩 반복하는 자리를 참 여러 번 만들어냈습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더 뼈아팠던 것은 그다음입니다. 막상 적어보려고 하니까 제가 뭘 원하는지 저도 정확히 모르고 있었더군요.
말로 할 때는 이런 것들이 다 넘어갑니다. 그 자리의 ‘분위기’가 알아서 채워주니까요. 그런데 글로 옮기는 순간 안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기록의 첫 번째 수혜자는 직원이 아니라 지시한 저 자신이었던 셈입니다.
세 번 말해도 안 되던 일이 한 번 적으니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제야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가 분명해진 것뿐이지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정도만 해봐도 꽤 달라지더군요.
첫째, 두 번째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세 번째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어, 이거 전에도 말했는데?” 싶은 순간이 신호입니다. 그때 말을 멈추고 적으면 됩니다.
둘째, 세 줄이면 충분합니다.
셋째 줄이 없어서 다시 물어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 했습니다”라고 가져왔는데 내가 생각한 ‘다’가 아닌 경우, 십중팔구 여기가 비어 있었습니다.
여유가 되신다면 하나 더. 적어서 보낸 다음에 상대가 이해한 것을 한 줄로 다시 적어달라고 해보십시오. 여기서 어긋난 것이 보이면 그날 3분으로 끝납니다. 안 보고 넘어가면 다음 주에 3시간을 씁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겪어봐서 압니다.
대신 이것만은 하지 마시길
기록을 나중에 따지기 위한 증거로 쓰는 것
딱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 “이거 봐요, 그때 이렇게 적혀 있잖아요.” 이 말이 한 번 나오는 순간 그 조직에서 기록은 죽습니다. 그때부터 다들 적기는 적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걸릴 말’은 안 씁니다. 알맹이 없는 문장만 차곡차곡 쌓이지요.
그러면 최악입니다. 파일은 늘어나는데 회의에서는 여전히 같은 말을 세 번씩 하고 있으니까요.
기록은 ‘추궁’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통하게’ 하려고 쓰는 것입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것을 상대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작업. 딱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말은 사라지고 기록은 남습니다. 그런데 남는다는 것이 핵심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적는 동안 생각이 정리된다는 것. 이게 ‘핵심’이고 남는 것은 그냥 따라오는 부산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회의에서 같은 말을 두 번째 하고 있다고 느끼시면, 그 자리에서 말을 멈춰보십시오. 그리고 세 줄만 적어서 보내보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언제까지, 뭐가 되면 끝인지.
세 번째는 안 하게 됩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겪어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적자생존.
직원들한테만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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